제목 [SPO 기획①] '불법' 사인훔치기, 야구계가 분노한 진짜 이유
등록일 2020.01.23 21:14
글쓴이 방병수
조회 15

신원철 기자 입력 2020.01.23. 17:00


▲ 2017년 휴스턴, 2018년 보스턴의 불법 사인 훔치기 스캔들은 한국 야구인들에게도 관심사였다. 스포티비뉴스는 4회에 걸쳐 불법 사인 훔치기, 그리고 사인 훔치기에 대해 집중 탐구한다.

'사인 훔치기'는 무죄…사건 본질은 '불법 장비 사용'

사인 훔치기, 타자에게 도움 안 된다는 연구도

그럼에도 용인되지 않는 이유, '순수성 훼손'

[스포티비뉴스=신원철 기자] 사인 훔치기를 금지하는 규정은 야구규칙 어디에도 없다. 허구연 MBC 야구해설위원은 그래서 사인 훔치기를 '신사협정 위반'으로 표현한다. 훔칠 수 있지만, 혹은 훔칠 수 있어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무언의 합의가 있다는 얘기다.

한국 야구인과 달리 메이저리그에서는 사인 훔치기를 승리를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많다. '훔치기'라는 부정적인 뉘앙스의 단어 때문일까. '사인 훔치기'에 대한 온도 차가 꽤 크다.

LA 에인절스 조 매든 감독은 "사인 훔치기는 경기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당할 것 같으면 사인을 바꾸면 된다는 식이다. LA 다저스 투수 켄리 잰슨은 지난해 주자 2루 상황에서 일부러 보크를 저지르기도 했다. 사인을 보여주기보다 3루에 주자를 두는 위험을 감수했다.

사인 훔치기를 긍정하는 이들도 부정하는 이들도 이 일이 불문율의 영역이라는 점은 공감한다. 그런데 기술의 발달로 불문율에 변화가 생겼다. 사인을 훔치는 일도 전달하는 일도 사람의 힘에 의해야 한다. 이 선을 벗어나면 불법이 된다.

지난해 11월부터 메이저리그를 뒤흔들고 있는 '사인 훔치기 스캔들'은 이 선을 넘은 '불법 사인 훔치기' 얘기다. 휴스턴 애스트로스, 보스턴 레드삭스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정한 선을 넘었다. 카메라로 사인을 읽어냈고, 이 일을 더그아웃 바로 옆에 숨어서 몰래 했다.

이 사건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2017년 보스턴-뉴욕 양키스의 사인 훔치기 폭로전부터 알아야 한다.

당시 보스턴 직원이 스마트워치를 활용해 리플레이룸에서 얻은 정보를 더그아웃에 전달한 일이 있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이 일을 계기로 각 구단에 더그아웃 내 전자기기 사용에 관한 규정을 다시 강조하면서 재발 시 처벌하겠다고 경고했다. 이 경고가 휴스턴 중징계의 근거가 됐다.

▲ 휴스턴은 미닛메이드파크 홈 더그아웃 근처에 모니터 장비를 설치하고, 중앙 외야 뒤에서 찍은 포수의 사인을 분석했다.

◆ 사무국 조사 결과, 징계 이유는 "관리 소홀"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약 두 달 가까이 휴스턴의 불법 사인 훔치기를 조사했다. 23명의 전현직 휴스턴 선수를 포함해 모두 68명이 조사 대상에 올랐다. 휴스턴은 2017년 시즌 초반부터 외야 중앙에 설치된 카메라를 활용해 상대 배터리의 사인을 해독하고 선수들에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에 알렉스 코라 당시 벤치코치, 카를로스 벨트란 당시 선수 등이 참여했다.

2018년 개막 전 사무국에서 경기 중 더그아웃 근처에서 통신 기능이 있는 전자기기 사용을 금지한 뒤에도 휴스턴의 불법 사인 훔치기는 계속됐다. 단, 2017년처럼 쓰레기통을 두드리는 방법은 활용하지는 않았다. 2018년 시즌 중반에는 사인 훔치기가 큰 효과가 없다는 의견이 선수단 안에서 제기되면서 불법행위도 중단됐다. 여기까지가 사무국의 조사 결과다.

롭 맨프레드 커미셔너는 "나는 사인 훔치기가 휴스턴 선수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다. 다만 휴스턴이 규정을 위반한 점, 불공정한 경쟁을 만들었다는 점에 대해 제재한다"며 "조직적인 불법 행위를 저지른 휴스턴과, 관리 의무를 다하지 않고 불법을 방조한 이들을 징계한다"고 밝혔다.

구단은 2020년과 2021년 드래프트 1, 2라운드 지명권을 상실하고 500만 달러(약 58억 원)의 벌금을 낸다. 500만 달러는 메이저리그가 규정한 벌금 최고액이다.

제프 르나우 전 단장은 자신은 선수단의 불법 사인 훔치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고 반발했다. 그러나 맨프레드 커미셔너에 따르면 르나우 단장이 이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 이메일이 남아있다. 그는 르나우가 구단 관리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징계 대상이 된다고 덧붙였다. 르나우는 1년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고, 휴스턴에서 해고됐다.

AJ 힌치 전 감독은 불법 사인 훔치기를 방조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 그는 사무국 조사 과정에서 어떤 방법으로 사인을 훔치고 전달했는지는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모니터를 부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반대 의사를 밝혔을 뿐 코라 전 코치나 선수들에게 직접 '하지 말라'는 뜻을 전한 적은 없다. 그 역시 르나우와 함께 1년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 휴스턴은 그를 해임했다.

◆ 사인 훔치기 얼마나 도움되나

사무국이 선수들에 대한 징계를 내리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인 훔치기가 타자들의 성적과 경기 승패에 얼마나 영향을 줬는지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야구인들의 시각은 어떨까. 스포티비뉴스는 전현직 감독, 현역 선수 등을 포함한 야구인 50명을 대상으로 사인 훔치기가 타자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설문조사에 참여한 야구인 가운데 절대다수가 '매우 도움된다(32표)' 혹은 '약간은 도움이 된다(16표)'는 쪽에 표를 던졌다. 허구연 해설위원은 "직구 아니면 변화구, 둘 중 하나만 알아도 히팅포인트가 달라진다. 엄청나게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1표), 혹은 방해된다는 의견(1표)은 극소수였다.

KIA 진갑용 코치만 '방해된다'를 택했다. 그러면서 "타자가 투수를 봐야지 주자를 보면 되겠나"라고 반문했다. 이는 가장 전통적인 방법, 2루 주자가 사인을 훔치고 전달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때 타자가 2루주자가 보내는 신호를 보느라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훔친 사인이 100% 다 맞는 것도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휴스턴이 불법 사인 훔치기를 중단한 이유도 집중력 문제였다. 메이저리그 사무국 조사에 참여한 선수들 가운데 일부는 "사인 훔치기가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타자에게 이익이 되기보다는 타석에서 산만해진다"는 의견을 냈다.

익명을 요청한 한 타자 출신 해설위원은 약간 도움이 된다는 의견을 내면서도 "사인을 가르쳐줘도 못하는 선수들도 많다. 영향을 미쳤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기 힘들고, 몇 % 정도 미쳤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얘기했다.

또 다른 전직 감독 역시 기본적으로는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지만 "투수의 제구 문제로 타자가 전달받은 코스와 다른 방향의 공이 들어올 때도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는 사인훔치기가 타자에게 방해가 될 때도 있다"고 설명했다.

▲ 휴스턴의 2017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축하하는 롭 맨프레드 커미셔너.

타자들이 느끼는 심리적인 안정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감성의 영역을 배제한 결과는 어땠을까. 휴스턴이 홈에서 더 나은 결과를 내지는 못했다는 결론이 '대세'다. 인식과 실제의 차이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팬그래프닷컴 "휴스턴은 사인 훔치기로 얼마나 실질적인 이득을 얻었나(How Much Did the Astros Really Benefit from Sign-Stealing?)"와 파이브서티에잇 "만약 휴스턴이 사인을 훔쳤다면, 얼마나 도움을 받았을까(If The Astros Stole Signs, How Much Did It Help Them?, 사무국의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 발표) 모두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파이브서티에잇의 트래비스 소칙은 "2016년과 2017년을 비교했을 때 휴스턴 타자들은 장타력은 늘면서 삼진은 줄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이 결론만 가지고 휴스턴의 불법 사인 훔치기가 성공을 거뒀다고 볼 수는 없다. 소칙은 "휴스턴 타자들은 홈보다 원정에서 더 나은 성적을 냈다"고 덧붙였다. 사인 훔치기에 의한 성공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득이 없었다 해도 '실익 없음'을 이유로 휴스턴의 불법을 변호할 수는 없다. 설문에 참여한 야구인들은 공통으로 휴스턴의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불법 사인 훔치기가 야구의 순수성을 훼손한 점을 지적했다.

이들은 카메라를 동원하고, 통신 장비를 활용한 시점을 '야구가 야구가 아니게 된' 순간으로 봤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계자는 "전자장비로 상대 사인을 훔치는 일이 허용된다면 나중에 도청장치를 상대 덕아웃에 두는 일도 벌어질 수 있다"며 경계했다.

스포티비뉴스=신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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