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50년 심판 생활 은퇴 앞둔 브루스 프로밍
등록일 2007.10.17 00:00
글쓴이 장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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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올린 날짜 : 2007년 7월 20일 글올리신 분 : 최혁 요란한 제스처와 큰 목소리의 스트라이크 판정이 프로밍의 트레이드마크입니다. ⓒ GettyImages/멀티비츠/나비뉴스 ‘플레이 볼(Play Ball)!!!!’ 지난 11일 샌프란시스코의 AT&T 파크. 그의 힘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2007년 올스타 게임이 화려한 막을 올렸습니다. 올스타 게임을 시청한 분들은 경기 종반 두 번이나 강한 파울볼에 맞아 고통을 참던 구심이 생각나실 겁니다. 올해 68세인 브루스 프로밍이 그 분입니다. 메이저리그 사상 최고령 심판입니다. 1939년 9월 위스컨신 주 밀워키에서 태어난 프로밍은 다른 청소년들과 마찬가지로 빅리그 선수를 꿈꾸던 소년이었습니다. 커스터 고교 시절 2루수를 맡았던 그는 고교 졸업 후 곧바로 세미 프로팀에 입단했지만 빅리그 선수가 되기에는 기량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또 한가지 소질이 있었으니 바로 심판을 보는 일이었습니다. 14살짜리 프로밍이 하루는 11~13세 리그의 심판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8세부터 야구에 미쳐있던 그는 마침 학교 야구팀 테스트에서 탈락했고, 심판이라도 하고 싶다며 지원을 했습니다. 한 경기에 3달러50센트라는 당시 학생에게는 아주 큰 돈이 주어졌는데 프로밍은 하루에 네 게임씩 1주일에 4일간 심판을 봤습니다. 프로밍은 당시를 회상하면 “한 주에 56달러를 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프로 선수가 되기까지 그런 큰 돈을 만져본 적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1957년 잠깐 세미 프로에서 뛸 때 그의 월급이 400달러였습니다.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있어 지원했던 야구 심판이 평생 그의 직업이 되리라고는 그 어린 나이에 상상도 못했겠지요. 선수 실패, 심판으로 전향 그러나 선수 생활을 접은 프로밍이 곧바로 마이너리그 심판으로 일하기 시작한 것은 1958년이었습니다. 이번 올스타전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프로밍은 “당시 나는 밀워키에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워털루로 갔다. 그리고 운동용품점에 가서 20달러를 주고 심판복을 샀다. 내 심판 생애는 워털루의 마이너리그 경기장에서 그렇게 시작됐다.”고 밝혔습니다. 만 18세에 프로야구 사상 최연소 심판이 됐지만 1년에 절반을 야구장에서 보내고도 수입은 쥐꼬리만했습니다. 고교 시절 첫 사랑이던 로즈매리와 일찍 결혼한 그는 겨울이면 온갖 일을 하면서 가정을 꾸려가야 했습니다. 작은 트럭을 운전하던 그는 석탄과 가구. 세탁물 등 무엇이든 배달하는 일도 했고, 얼음 공장에서도 일했습니다, 가장 수익이 많던 것은 장의사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시체 한 구에 20달러를 받았는데, 운 좋은(?) 날은 하루 2구의 시체를 처리하기도 했습니다. 부인 로즈매리도 오랜 동안 버스 운전을 하면서 두 아들을 키웠습니다. 오프 시즌 애견 블루와 함께 망중한을 보내는 프로밍. ⓒ GettyImages/멀티비츠/나비뉴스 그렇게 어렵게 마이너리그 심판 생활을 거쳐 프로밍은 1971년 드디어 MLB 내셔널리그의 심판이 됐습니다. 그때부터 올해까지 만으로 37년간 프로밍은 변함없이 ‘가장 꾸준하고 결단력 있고 경기 진행과 장악 능력이 있는 심판’으로 인정받고 존경을 받아왔습니다. 빅리그 심판 5000 경기 돌파 작년 8월16일 프로밍은 펜웨이 파크에서 벌어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전에 심판으로 나섰습니다. 3만6000여 팬들은 모두 기립박수를 치며 운동장으로 들어서는 프로밍을 맞았습니다. 자신의 빅리그 통산 5000게임째 심판을 보던 날이었습니다. ‘야구 심판계의 아버지’라고 부리는 빌 클렘(1874~1951년, 5374게임 심판 기록 보유) 이후 두 번째로 ‘5000게임 심판’이 탄생한 것입니다. 올 시즌 전반기까지 프로밍은 정규 시즌에만 5095게임에 심판으로 나섰습니다. 프로밍의 이력서는 정말 화려합니다. 그는 5번의 월드시리즈(22게임)와 10번의 리그챔피언십(52게임), 그리고 8번의 디비전시리즈(32게임)에서 경기를 진행했습니다. 이번까지 올스타전에도 세 번 심판을 맡았습니다. 1998년과 1999년 시즌 종료 직후 한 게임 플레이오프가 벌어졌을 때도 MLB 사무국은 플로밍에게 구심의 자리를 맡겼습니다. 통산 107번의 포스트 시즌 경기 심판을 맡은 것은 클렘의 104게임을 넘어선 역대최다기록입니다. 그는 지난 4월20일 클리블랜드와 탬파베이 경기에 1루심으로 나서 역대 최고령 심판(67세 204일) 기록도 세웠고. 37년이라는 최장기간 심판 기록도 수립했습니다. 프로밍은 또한 11번의 노히트 경기에 심판으로 나서 최다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심판 2년 차이던 1972년 시카고 커브스의 밀트 파파스 투수의 노히트 노런 경기에서는 구심을 맡아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9회말 투아웃까지 파파스는 퍼펙트 게임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타자를 남기고 프로밍은 아슬아슬한 공을 연속 볼로 선언, 파파스는 볼넷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다음 타자를 잘 처리해 결국 노히트노런을 이뤘지만 사상 12번째 퍼펙트 게임은 간발의 차로 놓치고 말았습니다. 파파스는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풀카운트에서 던진 공은 아슬아슬했지만 볼이었다.”고 인정했는데 나중에는 플로밍의 오판을 비난하는 쪽으로 말을 바꿨습니다. 플로밍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공은 점점 정확한 스트라이크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록을 위해서 볼을 스트라이크로 선언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라며 그런 비난을 일축했습니다. 올스타 게임에서 파울볼에 맞은 프로밍이 호흡을 고르고 있습니다. ⓒ GettyImages/멀티비츠/나비뉴스 최고의 심판으로 은퇴 플로밍은 마이너리그 시절에는 판정을 비난하는 장내 아나운서를 경기장에서 퇴장시킨 일도 있습니다. 또 오프 시즌에 고교 농구의 심판도 봤는데, 한 NBA 관계자가 강력하게 프로 농구 심판이 되라고 권유한 적도 있으니 심판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자기 주장이 강하고 충돌을 겁내지 않기 때문에 구설수에 종종 오르기도 했습니다. 클럽하우스에서 마이크 피아자의 사인을 받아서 벌금(심판이나 기자들은 절대 사인 요청 금지), 동료 심판의 판정을 한 선수가 비난하자 기자들을 불러 ‘심판 판정보다는 본인 성적에나 신경 쓰라’며 공개 비난을 해서 벌금, MLB 심판 관련 고위직 관리에게 유대인 비하 발언을 해서 10일 감봉에 벌금을 물기도 했습니다. 시력에 대한 질문을 받자 “태양은 1억5000만km나 떨어져 있다는데 내 눈으로 아주 잘 보인다.”고 일축해 ‘한 성격’ 보이기도 했던 프로밍은 ‘할리우드에서 심판 영화를 만들려면 프로밍을 연구하면 된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로 가장 대표적인 야구 심판으로 인정을 받아 왔습니다. 마이너 시절까지 합치면 지난 50년간 짙은 푸른색 심판복을 입고 야구장의 중심을 잡아왔던 플로밍은 이제 후반기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납니다. 빅리그 사상 가장 컬러플하고 단호하고 명확하면서도, 특이하게 요란한 스트라이크 콜로 팬들의 사랑을 받고 선수와 관계자들의 존경을 받던 프로밍. 심판 마스크를 쓴 그의 모습을 더 이상 운동장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은 미국 야구 팬들에게는 큰 아쉬움으로 남겠지만, 나이와 체력 등을 고려해 떠날 시기를 잘 파악하고 돌아서는 용기와 결단은 또 다른 귀감이 될 것입니다. 아마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프로밍이 다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명예의 전당 멤버가 되는 날일지도 모릅니다. 출처 :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151&article_id=0000001268§ion_id=107&menu_id=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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